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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6자유연수(성지순례) 보고서0
작성자 배영수 작성일 2006-09-05 13:28 조회 3119

2006년도 부산외국어대학교 직원 해외연수보고서


○ 연수구분 : 2006년도 직원 해외연수(B팀 : 자유연수팀)
○ 연수지역 :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성지학습)
○ 연 수 자 : 정 기영, 나 성대, 배 영수
○ 연수일정 : 2006. 07.10.(월) ~ 07. 19(수) (9박10일)
○ 여행후기 : 성지(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여행기

                                                                  배   영   수


  세찬 바람에 잔뜩 화가 난 듯 굵은 빗줄기가 까만 우산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뒤쪽에서 몰아치는 거센 바람이 가소롭다는 듯 우산을 부숴 버린다. 이렇게 짓굿은 날씨 속에 온 몸이 흠뻑 젖은 채로 나는 성지여행길에 올랐다.
  우리나라를 향해 올라오고 있는 태풍 에위니아의 영향으로 국내선 비행기는 모두 이착륙이 금지되었지만, 모든 국제선은 정상운항하기에 예정대로 출발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밤 12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두바이까지 가는 아랍에미리트항공 EK323편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러 번의 해외여행 경험이 있지만 이번처럼 가슴 벅찬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성도라면 모두가 꿈꾸는 하나님의 성지를 여행한다는 기쁨과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그것도 몸담고 있는 직장(부산외국어대학교)의 전폭적인 경비지원과 배려로 성지여행을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 하여서일 것이다.   

  10시간이라는 긴 비행시간을 거쳐 현지시간으로 새벽 다섯 시에 두바이에 도착하였다. 두바이에서 세 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EK927편으로 환승하여 한국보다 6시간 늦은 이집트 현지 시간으로 11시 40분에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Cairo)에 도착하였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고대문명의 도시 이집트! 정말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였다.
 
  점심식사 후 고대문명이 살아 숨 쉬는 이집트 박물관(-博物館 Egyptian National Museum) 관람에 나섰다. 이집트 고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다수의 유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이다. 위층과의 사이에 천장이 없는 1층 중앙홀은 2층 화랑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아멘호테프 3세와 그 왕비>의 상을 비롯해 많은 석상과 석관이 진열되어 있으며, 2층에는 투탕카멘왕의 유물 보관실과 미이라실이 별도로 독립되어 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속속들이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건물정면 왼쪽부터 이 홀을 둘러싸고 고대 왕조로부터 그레코로만에 이르는 유품 10만점 가량이 연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잘 보존된 유품들과 유물들의 웅장함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고대 카이로의 예수님 피난교회, 모세의 기념회당 등을 관람하고 카이로 시내에 위치한 조세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요란한 모닝콜 벨소리와 함께 아침이 밝았다. 새벽5시. 긴 비행시간과 바쁜 일정으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개운하고 상쾌한 아침이다. 5시에 기상 5시 반에 아침식사 6시 반에 출발, 정말 너무 고된 훈련을 받는 것 같았다. 이 곳 호텔의 식사는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 먹는 것과 고기와 유제품을 같이 먹는 것이 금기시되기 때문에 아침에는 주로 빵과 과일종류이고, 저녁에는 대부분 양고기와 닭고기 요리가 주류를 이룬다.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모든 짐들을 버스에 싣고 또 하루의 바쁜 일정을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간곳은 기자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정말 장관이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이집트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국왕, 왕비, 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약 80개가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 이집트의 유일한 젖줄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남북으로 약 90Km에 걸쳐 점재해 있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관람하는 피라미드는 그 중에서 가장 큰 세 개이며, 고대왕국의 제4대왕조인 쿠푸왕과, 그 아들 프레왕, 손자 멘키우레왕의 피라미드이다.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피라미드의 크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무게가 평균 2~2.5톤이나 되는 돌 230만개가 소요 되었으며, 돌 하나의 무게가 15톤이 넘는 것도 있다고 하니 이런 돌들을 가지고 어떻게 이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를 축조했을까? 당시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피라미드 앞에 있는 스핑크스는 무덤(피라미드)을 지키는 수호신을 의미 하는데, 그 자리에 있는 화강암을 높이 20m, 길이 72m로 깎아 만든 것이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관람을 마치고 모세의 출애굽 루트를 따라 7세기경 아랍의 상인들이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가는데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으며, 지금도 이집트의 재정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수웨즈 운하와  아기 예수님이 헤롯왕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난 온 곳 중의 한곳으로 알려진 마라의 샘, 이 마라의 샘은 마리아가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아기 예수께 젖을 먹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 광야와 르비딤 답사를 하고 홍해바다에서 잠시 수영을 즐겼다.
 
  모세의 출애굽 루트를 버스로 이동하면서 문득 이 황량한 광야를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황량한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했는데 오늘 우리는 시간이 허락하면 단 4시간이라도 이 광야를 걸어보는 체험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더니 처음에는 여행사에 따라 광야걷기 체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광야에서 몇 시간 걷고 나면 사람들이 지치기도 하고 사고자도 속출하여 전체일정에 차질이 생기므로 지금은 모든 여행사에서 거의 실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새삼 묵상하게 되었다.
 
  정말 그렇다. 현대인들이 4시간을 걷기 힘든 황량한 광야, 그 광야를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이 아니라 하루도 못살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40년 광야생활을 기록한 성경을 읽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불평불만이 많은 민족이요, 목전에서 이적과 기적을 목도하면서도 믿음이 없는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지에서 느끼고 체험한 광야는 우리가 상상만 하던 그런 광야는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피부가 따갑고 숨이 막힐 정도로 강열한 햇빛과 더위 속에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큰 나무 한그루 없고 바위 그늘도 없는 광야 길을 걸으며 지도자를 원망하고 불평불만을 터트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이스라엘 백성을 이해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믿음이 중요하지만, 광야생활은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12월부터 3월까지가 우기라고 한다. 우기라고 해야 평균 강우량은 50~60mm라고 하니 얼마나 황폐된 지역인지 짐작이 가리라. 현지 가이드로부터 지금 한국에는 태풍 에위니아와 장마로 인한 피해가 엄청나다는 소식을 접해듣고 생각해 보았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한국에 내리는 많은 비 가운데 1/10만이라도 이곳에 내리게 해 주시면 이 황량한 광야가 옥토로 변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지금 이곳은 건기이기 때문에 광야에 띄엄띄엄 있는 작은 풀포기들도 말라죽어가는 계절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같은 곳에 있는 풀들도 어떤 것은 완전히 말라죽고 어떤 것은 위에는 말랐지만 밑 부분은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현지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오아시스는 사막 가운데 조그만 우물이 있고 거기에 푸른 풀들이 자라고 조그만 나무들이 있는 그런 모습들을 생각하는데 사막에는 땅 밑으로도 드물기는 하지만 지상의 오아시스와 같은 오아시스가 있고 여기에 실오라기 같은 뿌리라도 끝만 조금 닿아 있으면 아무리 건기라도 풀이 완전히 말라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한참동안 눈을 감고 묵상해 보았다. 거친 광야에서 물줄기를 찾지 못해 말라죽는 풀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조금이라도 연결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있겠는가?
  나는 시편 23편을 읽을 때마다 환상에 빠지곤 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 이 부분에서 나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물가로 푸른 풀밭이 있고 그 풀밭위에 하얀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그늘에서 팔베개 하고 누워서 양떼를 바라보는 다윗을 상상하면서 파라다이스를 꿈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편 23편이 우리에게 있어서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현지에서 깨달았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다윗은 유대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 그 삭막한 광야에서 양떼들을 몰고 물과 풀을 찾아다니다가 풀 몇 포기 있고 실낱같은 물줄기라도 보면 야! 내가 이리오기를 잘 했구나. 하며 기뻐 할 만도 한데 다윗은 하나님께 찬양하기를 나의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나와 양떼들이 쉴 수 있게 해 주시는구나! 또 조그만 바위 그늘을 만나도 아 시원하다! 하지 않고 나의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내가 이렇게 시원하게 쉬는구나!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인가? 다윗과 같은 신앙이 아니면 과연 이런 찬양이 나왔을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너무나 환상에 빠져서 작은 일에는 소홀히 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지 묵상해 본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도착하니 피곤한 가운데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된다. 과연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한다고는 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삶은 아니었는지? 조용히 눈을 감고내 자신을 뒤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이란 어느 것 하나 내 세울 만한 것 없고 모든 것이 허물투성이였구나! 생각하니 너무나도 부끄러운 삶을 살았고, 헛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구나! 생각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는 너무나도 과분하고, 얼마나 감사한지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내일은 시내산(Mount Sinai) 등정을 위해 새벽1시에 일어나야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렇게 뜬 눈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7월 13일 새벽 1시 우리는 모든 짐들을 꾸려 버스에 싣고 시내산 등정을 위해 시내산으로 향했다. 시내산은 성경에서 호렙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시나이반도 남쪽의 황량한 사막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화강암의 바위산이다. 시내산은 여러 개의 주봉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주봉가운데 하나인 모세의 산은 그 높이가 2,285m이다. 이 모세의 산 정상에는 4세기경에 처음으로 기념교회가 지어졌고, 현재 시내산 정상에 남아 있는 교회건물은 1934년에 재건한 것으로서 일명 ‘삼위일체 기념교회’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잠겨있어 그 내부는 볼 수 없고 겉모습만 볼 수 있다. 시내산 북쪽에는 약 400에이커(약492,000천여 평)규모의 평지가 있는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에서 일 년 이상 진을 치고 지내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으며,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오른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든 곳도 이곳으로 추정한다.
  시내산 입구에서 산 중턱까지는 낙타를 타고 가고 낙타가 갈 수 없는 곳부터는 말 그대로 등산을 하는데 풀 한포기 흙 한줌을 보기 힘든 바위산을 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새벽이라 무척이나 추웠다. 새벽 다섯 시경에 정상에 올라 따뜻한 컵라면 하나를 먹고 나니 추위도 좀 가시는 것 같았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그 자리에 내가 지금 서 있구나 생각하니 창조주의 무한하심과 크신 사랑에 감정이 복받쳐 가슴이 뜨거워지고 터질 것 같은 희열을 숨길 수 없었다.   
  5:40분경에 일출이 시작되었다. 시내산 정상에서의 일출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올라와 일출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나도 여러 각도에서 일출모습과 바위산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하여 성 캐더린 수도원을 관람했다.

  4세기 초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캐더린은 용모와 학식이 출중했다고 한다. 당시 이집트의 막시미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했으나, 그녀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세례를 받고, 황제의 우상 숭배를 비난했다. 황제는 여러 학자들을 보내 캐더린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들마저 예수를 믿게 되자 결국 캐더린은 고문을 받아 순교하게 되고, 그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시나이 반도 제일 높은 곳으로 옮겨진다.
  이 사건 이후 시내산 수도원이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수도원의 역사적 배경은 3세기 중엽부터 수도사들이 찾기 시작했고, AD 330년에 헬레나 모후가 불붙는 떨기나무 자리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납하는 교회를 짓는다.
  4세기경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게 되고 5세기 중엽에는 시나이 교구가 성립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요새화된 장방형의 수도원이 건설되었는데 이 수도원이 완성된 것은 AD 557년이다.

  성 캐더린 수도원에는 이콘 이라고 불리우는 목판성화가 2,000여 개나 보관되어 있다. 성 캐더린 수도원 내에 있는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6세기 중엽에 건설되었는데, 이 교회로 들어가는 나무장식문은 건립 당시 만든 문으로써 1,400년 이상 된 문이다. 교회 안에는 12기둥이 있는데 이것은 12달을 의미하며, 기둥위에는 그달의 성자 이콘이 있다.
  이 교회 제단 뒤에는 “불붙는 떨기나무”의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이곳은 지금도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 모습을 나타낸 교회 전단 중앙에 있는 모자이크는 왼쪽부터 엘리야, 요한, 예수님, 베드로, 야고보, 모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이 둘레에는 12제자, 12예언자, 건축당시의 수도원장 룽지너스, 집사 요한 등 모두 26명의 모습이 둘러져 있다. 이 교회 근처의 떨기나무는 시나이 반도에서만 자라나는 특수한 종류로써 오늘날에도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성 캐더린 수도원을 답사한 후 우리는 타바 국경으로 향했다.   
  시나이 반도를 버스로 달리면서 버스 차창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검은 복장의 유목민(베두윈)들의 양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시나이 반도는 6만2천 Km² 크기의 삼각형 모양의 대륙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리학적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시나이 반도에는 약 25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약 60%가 아랍계열의 유목민인 베두윈족인데 이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좇아 물과 꼴을 찾아서 광야를 이동하고 있으며, 대추야자, 올리브, 귀리 등을 재배하여 식량과 가축들의 사료로 쓰기도 한다. 이들은 아직도 이집트의 국법 보다는 그들만의 부족법을 따르고 있으며, 이들은 정착을 위한 농경이나 집을 짓지 않고, 임시 거주할 집은 야자수 잎 등으로 짓는데 지붕이 없이 사면만 가리는 형태로 짓는다. 아직도 유목민 생활을 하는 이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최첨단 시대라고 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광야 길을 몇 시간을 달려 타바 국경에 도착했다. 이집트 국경을 나올 때는 보안검색이 비교적 간단하였으나, 이스라엘 국경을 들어올 때는 보안검색이 철저했다. 이스라엘이 보안검색으로 유명 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약 한 시간에 걸쳐 타바 국경을 통과하여 다시 아라바 광야를 가로질러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이집트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이스라엘 땅에 들어선 우리는 일정을 약간 변경하여 통곡의 벽(痛哭-壁 Wailing Wall)과 성전산의 황금돔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통곡의 벽은 헤롯왕(BC 37~BC 4)이 예루살렘 신전을 증개축할 때 쌓은 신전 서쪽 옹벽의 일부이다. 이것이 통곡의 벽이라 불리게 된 것은 AD 132~135년의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이 비극으로 끝난 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가 4세기에야 그들은 1년에 한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신전이 파괴된 날로 전하는 아브월(Ab월:유대력 5월)9일에 허물어진 신전을 찾아가 일부 남아있는 옹벽 밑에서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며 신전의 소실과 나라의 멸망을 슬퍼하고 애통하였는데 이때부터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이 벽은 유대교의 가장 인상 깊은 상징물로 되어 있다.
  일명 황금돔 이라고 불리는 바위돔(Dom of the Rock)은 637년 이슬람(회교)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성전산, 곧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곳에 처음 세운 사원으로 오말 사원이라고도 한다. 이슬람에서는 마호메트가 승천한 곳이라 믿고 있다. 정팔각형의 기하학적 구조로 설계된 벽에는 화려한 모자이크로 된 창이 있고, 코란의 기도문과 알라세계의 조화를 상징한 전형적인 무늬가 사원 안과 밖에 장식되어 있다. 팔각면의 벽체가 있으나 문은 동서남북 네 군데만 출입문이 있고 중앙에 있는 황금 빛 찬란한 돔은 순금으로 만들어 졌으며 예루살렘의 어느 곳에서나 눈에 띄는 도시의 상징적인 명물이다.  

  이스라엘에서의 둘째 날 우리는 이른 아침을 먹고 첫 답사지인 마사다(Masada)로 향했다.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을 가진 마사다는 사해의 서쪽 약 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변 유대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이 434m의 천혜의 절벽 요새의 웅장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요새의 정상은 길이 620m, 넓이는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50m, 평균 120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BC 160~143년에 대제사장 요나단(Jonathan)이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들었고, 그 후 유대왕 헤롯(Herodes)이 AD 35년에 여기에 왕궁을 짓고 성벽을 쌓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 무렵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유대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졸라대고 있었는데, 로마에 기대고 있던 헤롯은 유대인의 반란과 로마의 배신을 두려워하여 마사다를 유사시의 피난처로 만들었고 왕궁, 목욕장, 곡물창고, 군영, 파수대 등을 건설하였으나 그의 생애동안에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자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7명의 “열심당원”이라 불리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점령하여 저장된 물과 식량, 무기를 이용하여 로마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제10군단은 천연적인 요새 때문에 마사다를 함락 시키지 못하고 3년 동안이나 마사다와 맞먹는 인공 토담을 쌓은 후에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령 직전 마사다에 있던 967명의 유대 ‘열심당원’들은 비굴한 항복을 하는 대신에 차라리 죽기로 하고 서로를 죽여 자살을 하고 만다. 오늘날 이곳은 이스라엘 신병 군인들의 정신적인 훈련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마사다에는 엄청난 옥수수와 콩, 대추야자와 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으며, 신선하고 잘 익은 과일들이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마사다 관광을 마친 우리는 사해(Dead Sea)와 쿰란(Qumran)을 향해 출발했다.
해발 750m의 모리아산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길을 따라 35Km정도 내려가면 황량한 유대광야를 끼고 지표 밑으로 깊숙이 내려가 길게 뻗어있는 사해바다를 만나게 된다. 남북의 길이가 77Km, 동서 최대 폭이 16Km, 면적은 965Km²로 갈릴리 호수의 여섯 배나 되는 사해바다는 해저 420m에 위치해 있다. 갈릴리 호수에서 흘러나온 요단강이 광야를 적시고 매일 5백만t 씩 사해에 유입되지만 언제나 넘치지 않고 일정한 수면을 유지 하는 것은 뜨거운 날씨로 인해 그만큼의 물이 수증기로 증발하기 때문이다. 코발트색의 바다로 무척 아름답지만 소금농도가 30%에 달해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말 그대로 사해(死海)바다이다.
  사해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엔게디가 있는데 이곳은 헤브론에서 거의 정동쪽에 있는 샘과 이에 딸린 내(개울)의 이름으로 사해 서쪽에 있는 석회석 벼랑 아래서 많은 물이 솟아나와 이루어진 곳이다. 이 근처에는 굴이 많고 이곳의 폭포는 남부지방의 유일한 폭포요, 부근은 자연보호지역으로 뛰어노는 들짐승들을 볼 수 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이 엔게디 굴에 숨었었다. 엔게디는 BC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적이 남아 있고, 당시의 신전과 제단의 유적이 있으며, 비잔틴 시대의 건물 유적과 유대교 회당의 유적도 있다.
  사해 근처의 유일한 오아시스 엔게디에는 사해에서 수영을 즐기려는 인파로 언제나 붐빈다. 우리도 이 사해바다에서 약 2시간의 머드 수영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사해바다 북쪽 서단에서 해변을 끼고 남쪽으로 5Km쯤 가면 쿰란이란 고대 거주지가 나타나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3백여m 떨어진 곳, 유대광야의 높은 언덕이 막 시작되는 입구에 이상하게 생긴 동굴 11개가 있는데 이곳에서 금세기 인류역사에서 놀랄만한 것이 발견되었다. 바로 사해사본이다.
  1947년 어느 날 베드윈족의 양치기 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언덕위에 있는 동굴을 발견하였고 그 소년은 가까스로 동굴 근처까지 올라가 동굴 속으로 돌을 던져보았다. 혹시 그 안에 양이 들어갔으면 돌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작정하고 몇 시간의 노력 끝에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넓고 평평하게 다듬어진 동굴 속에는 질그릇항아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소년은 혹시 보물 항아리가 아닐까 생각하고 손을 넣어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가 손에 잡혔다. 이 두루마리는 성경 이사야서를 고대 히브리어로 빼곡히 적어놓은 구약 필사본이었다.
  이렇게 발견되기 시작한 사해사본은 그 후 여러 해를 걸쳐 주변 여러 동굴에서 에스더를 제외한 성서의 모든 문서와 경문서, 주석서, 제의문서 등이 발견되었다. 이 두루마리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이곳에서 쿰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에세네파 사람들이 율법과 예언서를 필사해 자손들에게 물려줬던 것으로서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쿰란공동체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194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여 제1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쿰란공동체 집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쿰란공동체는 서기 68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들은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두루마리 구약성서와 문헌들을 항아리에 담아 동굴에 숨겨 놓았다.

  사해사본이 2천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은 매우 건조한 이 지역 기후 탓이다. 사해 사본은 가장 오래된 구약 필사본이며 현재 예루살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쿰란 공동체를 관람한 우리는 사해사본의 발견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금세기 최고의 발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지역의 매우 건조한 날씨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으며 와디켈트를 구경하고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는 게세마네 동산이 있는 감람산으로 갔다.     감람산에는 ‘승천기념교회’와 ‘주기도문 기념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에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감격해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감람산 정상에 올라서면 예루살렘 시가지, 요르단계곡, 사해의 북쪽 끝, 길르앗, 모압의 산들을 바라 볼 수 있다.   감람산을 내려와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다.

  7월15일 토요일이다. 오늘은 유대인의 안식일이므로 일정을 조금 변경하기로 하였다. 원래는 오늘 갈릴리 선상예배 후 호텔에 투숙하게 되어있으나 주일인 내일로 선상예배를 미루고 다른 코스를 먼저 답사하기로 하였다.
  그 첫 번째 코스가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가신 십자가의 길이었다.
  지금은 비록 양쪽으로 상가가 들어서고, 돌 블록으로 되어있는 길이지만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이다. 2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내가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묵상하게 되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주님께서 그 모진 고통을 당하시며 이 언덕길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셨단 말인가? 주님은 내 죄 때문에 살을 찢기고 보혈을 흘리시며, 그 모진 고통 속에 능멸과 조롱을 당하시며 지고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시므로 진홍같이 붉은 내 죄를 흰 눈같이 깨끗하게 씻어 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였나? 그러면서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백할 수 있을까? 내가 내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또 내 자신에게 스스로 속고 있지는 않는가? 내 자신을 돌아보니 한없이 부끄럽기도 하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쳐 주시고 주님을 찾을 때마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의 작은 음성에도 언제나 귀 기울려 들어주시며 만나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기도 하였다.
  십자가의 길을 한 발자욱 한 발자욱 걸으며 문득 깨달은 것은 일반 해외관광과 하나님의 성지관광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 해외관광은 가능한 한 여행을 즐기면서 시각적으로 보이는 그 나라의 사회상과 풍습들, 그리고 유적들을 많이 보고, 듣고, 배워서 지식에 접목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성지관광의 목적은 여행자체가 힘들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성지를 직접 밟으며 현장에서 느끼고 체험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접목시켜 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고 깨달은바 은혜를 정금 같은 믿음으로 승화시키고,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재무장 하고자 하는 다짐이요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주님께서 걸으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다시 걸어 내려온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과 안나 기념교회를 방문하였다. 또 시온산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과 다윗왕의 가묘를 답사한 뒤 가이사랴 항구를 지나 엘리야 선지가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였던 갈멜산에 올랐다. 갈멜산 꼭대기에는 1868년에 세워진 ‘므흐라카(Muchlaka, 불의제단)’라 불리는 카르멜 수도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은 본래 십자군의 성채가 있었던 곳으로 수도원 옥상에 서면 서쪽으로 지중해 쪽 뿐만 아니라, 북동쪽으로 이즈르엘 평원(Yizreel Valley), 남쪽으로 사마리아 산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입구의 벽면에 있는 갈멜산 사건의 부조는 눈여겨 볼만하다. 교회 뜰에 세워진 칼을 들고 서 있는 엘리야의 석상은 우리의 신앙을 뒤돌아보고 재무장 하도록 요청하는 듯하다.
 
  갈멜산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헤롯왕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 돌아와 사셨던 나사렛과 예수님이 처음으로 이적을 행하신 가나 지방으로 갔다.
  나사렛에서 북동쪽 8Km에 위치한 가나 마을은 아주 작은 마을이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결혼식 장면은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주고 있는듯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고 한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팔복산(Mount of Beatitute)과 오병이어교회, 베드로 수위권 교회를 방문하고자 가나 마을을 출발 하였다.
  버스에서 잠깐 잔 것 같은데 팔복산에 도착하였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갈릴리 호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산 위의 야외극장식 벌판을 바라보면서 2천년 전의 복음의 현장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그 모습은 변화가 없었고 수천 명의 군중들이 운집하여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시간을 넘어선 장소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팔복산은 성경에는 따로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산상수훈을 설교하실 때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하였다. 바로 이 산을 일컬어 팔복산이라 하였으며, 이곳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지 위에 1938년에 새로 팔복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라는 8각형 모양의 기념교회가 세워졌는데 이탈리아 건축가 바루치(Barluzzi)가 설계했으며, 지금은 이태리 프랜시스컨 수녀회가 돌보고 있다.
  오병이어교회는 신약 4복음서에 기록되어있는 오병이어 사건의 현장에 세워진 기념교회로 희랍어로는 ‘일곱개의 샘(heptapegon)’이라고 한다. ‘일곱’이라는 숫자인 hepta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히브리어 명칭의 ‘Ein Sheva’는 일곱 개의 샘이라는 뜻으로 역시 일곱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다. 기념교회가 세워진 위치는 팔복산으로부터 바다로 경사를 따라 내려와 바닷가에 세워져 있으며, 5세기 비잔틴 시대의 교회위에 1936년에 다시 세워진 카톨릭 성당이 있다. 비잔틴 시대의 남은 모자이크 가운데 오병이어의 모자이크는 매우 유명하며, 갈릴리 호수 주변의 생물들을 새겨놓은 모자이크는 당시의 생태계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값진 자료가 된다.
  베드로 수위권교회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 다시 오셔서 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와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이 사람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 하시던 곳으로 작은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4세기 후반에 세워진 비잔틴 교회의 벽면을 보존하면서 1933년에 해변 가에 다시 세워진 이 교회 안에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함께 잡은 고기를 구워 잡수시면서 대화를 나누시던 바위(Mensa Christi)가 보존되어 있어, 주님과의 사랑 -강요된 사랑이 아닌- 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묵상과 기도처가 된다.
  현재 여기에 계시는 신부님은 재작년까지만 해도 창원 성당에 계시던 분으로 한국말도 잘 하시고 한국인들을 무척 좋아 하셔서 교회 앞 의자에 같이 앉아 사진촬영도 하시곤 한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면 원 달러하며 손을 내밀어 주변 사람들을 웃기곤 하지만, 돈은 절대 받지 않으신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갈릴리 호수가 호텔에 돌아오니 일곱 시가 넘었다. 너무나 피곤하여 저녁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샤워만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꼬끼오~~ 꼬끼오~~새벽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것도 주님으로부터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고 책망을 들은 베드로가 고기를 잡던 이 갈릴리 호수가 호텔에서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 기분이 묘했다. 주님께서 나에게 깨우침을 주시기 위함인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고난당하시던 날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 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 이 새벽에 베드로가 고기 잡던 그 호수 가에서 저에게 닭 울음소리를 들려주심은 저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심인 줄 알고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을 믿고 산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이 연약하여 어리석은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부하고 편할 때는 주님을 잊고 살고, 세상적인 쾌락과 유혹에 끌릴 때에는 주님을 회피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핍박 받거나 고통당할 때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일 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은혜가운데 지켜 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데 닭이 두 번 울고, 세 번 울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날은 훤히 밝아오는데 갑자기 머지않은 곳에서 쾅하고 대포소리 같은 폭음이 두어 번 들린다. 잠시 후에는 총소리도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지난밤 CNN뉴스를 통해 레바론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대강 짐작은 하였으나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지금까지 은혜가운데 지켜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주님! 오늘이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마지막 일정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성지를 밟아보고 느껴보고 체험해 보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 인줄 압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옵소서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옵소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기도 중에 내 머리를 스쳐가는 것은 그렇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하나님이요, 멈추게 하는 것도 하나님인데 내가 왜 걱정을 하는가? 내가 걱정한다고 일이 해결되는가? 하나님께서 예정대로 머물게 하시든지, 아니면 빨리 요르단으로 도피 시키시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순종만 하면 되는데 괜한 걱정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 내 자신도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편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기쁨이 넘쳤다.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다른 방에서 자고 있는 일행을 깨우러 갔다. “장로님 갈릴리 호수가로 산책 갑시다. 갈릴리 호수에서 세수도 하고, 해 뜨는 모습을 사진도 찍고......” 마지못해 따라 나서는 장로님들의 얼굴에 어딘지 모르게 걱정스런 모습이 역역이 나타남을 엿볼 수 있었다. 갈릴리 호수가 울창한 가로수 산책로를 걸으며 장로님 한분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배집사 괜찮겠나? 오늘 일정 취소하고 빨리 요르단으로 가야 되는 것 아닌가?” 하신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장로님 괜찮을 겁니다. 주일날 갈릴리 선상예배 드리려고 어저께 일정도 변경했는데 예배는 드리고 가야지요. 참 장로님 어제 밤에 닭 우는 소리 들으셨어요? 갈릴리 호수가 호텔에서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 묘하던데요.” “배집사도 들었구나! 나도 들었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아침산책을 마치고 호텔식당에 갔더니 다른 팀원들은 벌써 아침식사를 거의 다 마친 상태였다. 급히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호텔에서 그리 머지않은  가버나움으로 출발했다.
  가버나움 관람을 하고 있는데 현지 가이드 이신 전도사님께서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심각하게 받더니 상기된 얼굴로 우리 팀원들을 모았다.
  갈릴리 선상예배를 위해 예약해 놓은 배도 취소되고, 모든 식당도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지금 이스라엘 상황이 심각 하다는 것이다. 자신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오늘 일정에 대해 우리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한다. 모두다 대강 짐작들은 하고 있는 터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도사님 모두들 대강 짐작은 하겠지만 저희들은 이곳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모하게 일정대로 진행하자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솔하게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요르단으로 빨리 넘어가자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곳 지리와 사정을 아시는 전도사님께서 상황을 판단하셔서 결정 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전도사님께서 상황을 판단하시고 진행할 수 있도록 전도사님께 위임합시다.” 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모든 팀원들이 동의해 주었다.
  이렇게 마무리 하고 다시 관람 하는데 젊은 전도사가 내 옆으로 다가서더니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집사님 괜찮을까요? 하고 다시 묻는다. 전도사님 나도 모르고, 전도사님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순리대로 합시다. 젊은 전도사가 처음 겪는 일이라 걱정도 되고, 또 내가 팀원들에게 의견을 제시 했다고 나에게 물어 오는데 그 말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내 말을 들은 전도사님께서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여러 군데 전화를 걸어 다른 배를 알아보고 식당을 물색한 결과 열시 반에 배도 예약이 되고 가까스로 호텔식당도 예약할 수 있었다.  비록 예정보다 단축되기는 했지만 열시 반에 배에 승선하여 15분간 짧은 예배를 드리고 열한시에 이른 점심을 먹게 되었다. 식당에 자리 잡은 우리 일행은 모두 다 베드로 고기 한 마리씩을 들고 점심을 먹으면서 이구동성으로 감사하는 것은 원래는 현지식당에 예약이 되어 음식이 맞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호텔식당 에서 한식에 가까운 음식이 대부분인 식사를 하게 돼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서둘러 하롯샘을 거쳐 밷산 국경을 빠져나갔다. 철저한 보안검색으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스라엘 국경. 감도는 전운 때문인지 너무나도 까다로웠다. 어렵게 이스라엘 국경을 지나 요르단 국경을 통과한 우리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모두 지쳐있었다. 참으로 드라마 같은 시간들이었다. 국경 간 이동 버스에서 요르단 지역 관광  버스에 짐을 옮겨 싣고 버스 뒷자리에 자리에 앉은 나는 묵상기도를 드렸다. 우리의 세미한 음성까지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저희들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을 감사 합니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사모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긴장이 풀려서 인지 잠이 몰려왔다. 조금 잔 것 같은데 요단강입니다. 내리세요. 하는 가이드의 말에 버스에서 내려 보니 폴짝 건너 뛸 수 있을 것 같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요단강이란다.
  요단강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데 지금은 강이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시골 개울 같았다. 요단강! 얼마나 종교적 의미가 있는 강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하고,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죽음이라는 요단강을 반드시 건너야 하는 상징적인 강인데,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굳이 요단강이라고 해서 폭이 넓고 많은 물이 넘실거리며, 강을 건너려면 큰 다리가 놓여 있든지 아니면 배가 있어야 하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 없이 요르단의 수도 암만(Amman)에 도착하여 호텔에 투숙할 예정이다.

  요르단(Jordan)에서의 일정은 좀 여유로운 듯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일곱 시까지 잘 수가 있었다. 오늘은 짐도 챙기지 않는다. 요르단에서는 같은 호텔에서 이틀을 투숙하기 때문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페트라(Patra)로 향했다.
  페트라는 ‘바위’라는 뜻으로, 성경에는 셀라(Sela)로 표현 되었다(왕하14:7, 사16:1). 페트라는 요르단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Km지점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기원전 300년 전에 나바티안족에 의해 세워진 교역중심 요새 도시로서, 사도 바울이 다마스커스(Damascus)로부터 나와서 피난한 곳으로 알려졌다. 페트라는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 졌는데 그 높이가 평균 70m~80m이며, 일명 협곡이라 불려 지기도 한다. 이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장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는 암벽을 깎아 만든 각종 신전, 무덤들이 자연소재 그대로의 색상과 구조로 보존되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원전 3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도시에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에도 현대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고 한다.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갔다고 하여, ‘무사와디’(모세의 계곡)라고 불리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전 세계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 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죤스/마지막 성배’의 촬영장소로 유명해 졌다.
  이곳 페트라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고대 문명의 골간을 이룬 유럽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 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버린 곳이며,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윈들이 양떼를 한가로이 몰고 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페트로 관람을 마친 우리는 다음 관람지인 마케루스 요새로 이동 하였다.

  세례 요한이 갇혔던 마케루스 요새는 서기 70년 9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사실상 끝낸 제1차 유대독립전쟁 당시 베들레헴 남쪽에 자리 잡은 헤로디온 요새, 사해 서부의 마사다 요새와 더불어 유대 독립군 일부가 로마군에 끈질기게 항전했던 요새이다. 서기 27년경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한동안 이 요새에 가두었다가 참수했다. 그래서 요한의 순교 터라고도 하고, 요즘 아랍인들은 이 요새를 ‘미슈나카’(Misgnaqa)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래 예루살렘 주재 프란치스코회 성서연구소는 1978-1981년 네 차례에 걸쳐 마케루스 요새를 발굴하여 화려한 로마식 목욕탕, 큰 응접실과 작은 응접실을 찾아내기도 했다.

  마케루스 요새 관람을 마친 우리는 왕의대로(King's Highway)를 달려 아르논 골짜기에 도착하였다. 이 깊은 골짜기는 고대 모압과 아모리인의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었던 곳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곳을 경유하였으며, 통일왕국에서 분열왕국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차지하였었다. 아합왕 이후에 모압은 아르논 이북을 다시 차지하지만 후에 아랍에 의해 정복당한 이후에는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이라는 의미의 ‘엘 무집’이라는 명칭으로 불려 지기도 했다. 계곡 기슭에는 다리가 놓여 있는데, 다리 서쪽에는 로마시대에 놓았던 다리 흔적이 남아있다. 폭4Km, 깊이 400m -1Km 정도의 이 골짜기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내려갈 때는 거의 9Km 가까이를 올라갈 때는 거의 11Km를 곧바로 올라가는 지형으로 되어 있으며, 지세가 가파르고 골짜기가 깊어 천연적인 경계선이 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광야 길을 지나 암몬성과 헤스본성을 관람하고 오늘의 여정을 마감하였다. 암몬에서의 마지막 밤, 아니 이번 성지여행의 마지막 밤은 정말 뜻 깊은 밤이었다.

  한 달에 한번 보기도 힘들다는 현지 결혼식이 마침 우리가 투숙하고 있는 호텔에서 있었다. 밤 여덟시부터 결혼식 환영식이 시작되었는데 신랑 신부를 가운데 세워놓고 타악기를 요란하게 두드리며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고, 호텔 앞에서는 폭죽을 터뜨리고 정말 대단했다. 한 시간 반 정도 요란한 환영식을 하더니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신랑 신부가 정통 모슬렘이므로 남자들은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여자들만 결혼식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조금은 아쉬웠다. 결혼식하고 음식 먹는 시간 좀 조용하더니 결혼식을 마치고 나니 환영식 때와 마찬가지로 신랑 신부를 가운데 세워놓고 노래하며 춤추며 악기를 두드리며 정말 요란한 결혼식 파티를 했다.
  여덟시에 시작된 결혼식이 새벽 두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정말 대단한 결혼식이었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결혼식인데도 투숙객 누구하나 시끄럽다고 불평하는 사람 없이 모두가 축하해 주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런 뜻 깊은 밤을 보낸 우리 일행은 마다바로 향했다. 이제 마다바와 느보산 관람으로 이번 성지 여행은 모든 일정을 마치게 된다.
  마다바는 암몬시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요르단의 왕의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 가다가 모압산맥 등성이에 위치한 첫 번째 도시가 마다바이다. 기독교 도시인 마다바는 다수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벽화 및 바닥들이 발견 되었으며, 그리스 정교 교회인 세인트 죠르지 교회에 보관되어 있는 6세기 시대의 예루살렘 시가지 지도가 모자이크 벽화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다바 시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해발 835m의 느보산이 있다. 현재 느보산 정상에는 모세의 무덤위에 처음 세웠다는 교회 터가 다시 복원되어 있으며, 1932년에 세워진 프란체스칸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느보산 기념교회 앞 공터 전망대에서 멀리 바라보면 사해와 가나안이 보이고, 맑은 날에는 예루살렘의 감람산 지역까지도 식별이 가능 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느보산에 올랐을 때는 모래바람 때문에 사해와 가나안을 희미하게 확인할 정도였다.   

  느보산은 출애굽여정의 마지막 기착지이다.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약속 하셨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는 이곳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숨을 거두게 된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근거로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한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나이 반도(광야)에서 여호와께 반역한 죄 때문이고, 둘째는 가데스에서의 모세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라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모세의 삶의 여정에 대해 아는 대로 생각해 봤다. 많은 사람들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인정 한다고 하더라도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랫동안 훈련받은 준비된 지도자였다. 모세는 애굽에서 교육받는데 40년, 광야에서 적응하고 연단 받는데 40년, 출애굽 후의 대 장정에서 40년, 그리고 지금 그의 나이 120세다.
  그가 120세이지만 그의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그런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여기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는 하되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는 말씀을 들었을 때 모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세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너무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40년이란 긴 세월을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고, 내 기력이 아직까지 쇠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저 가나안을 바라만 보고 죽으란 말입니까? 정말 억울합니다. 나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며 하나님께 간청해 봄직도 한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세가 들어가지 못한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이지 ‘천국’은 아니다. 들어가서도 일곱 족속을 다 멸해야만 하는, 그리고 계속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라’ 하기도 하시고, ‘서라’ 하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모세의 위대함은 때를 맞춰 일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사명이 가나안 입구 즉, 느보산까지 임을 스스로 알았다. 부족한 나를 지금까지 연단시키시고 키우신 것은 여기까지 쓰시려고 하셨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아름다운 삶을 마감하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모세처럼 가장 높을 때 스스로 낮아지고, 가장 명예로울 때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참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열흘이라는 짧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모든 일정을 끝내고 공항으로 가려니 무척이나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언젠가는 한 번 더 오리라는 다짐하면서 암만 공항으로 향했다. 내일 밤이면 아늑하고 포근한 가정으로 돌아가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의 듬직한 모습과, 사랑하는 아내의 환하게 미소 짖는 천사 같은 그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 연수결과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번연수는 인류문명과 종교역사의 발상지인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를 여행하면서 고대 인류문명의 발달과정과 종교역사의 발자취를 현지에서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해 봄으로써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느껴보지 못했던 폭넓은 문화와 사회적 풍습의 변천과정을 배울 수 있는 뜻 깊은 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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